카타르에서 개최된 AFC 아시아컵 2011은 일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참가한 팀은 이 대회에서 어떤 수확을 거두었고, 또한 어떤 과제를 남겼을까? 우승을 차지한 일본과 3위의 한국, 그리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2팀(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중국까지 3팀을 선정, 각 팀에 정통한 저널리스트가 총괄해 보았다.
일본대표 총괄:대회 성적 우승
우선 제일 먼저 주목할 점은 AFC 아시아컵 2011이라는 아시아 대륙 최고의 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법을 일본은 확실히 알고 실천했으며 실제로 우승을 차지한 점, 여기에 일본 축구의 앞으로의 발전과 힘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과거 3번의 우승과 비교하면 이점을 더 잘 알 수 있다. 첫 아시아 정상에 선 것은 1992년으로 미우라 요시카즈와 나카야마 마사시, 키타자와 츠요시 등의 당시의 젊은 세대가 축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신바람을 타고 만들어낸 우승이었다. 8년 후인 2000년에는 오노 신지와 타카하라 나오히로 등의 소위 “황금세대”의 영웅들이 필립 토르시에 감독의 전술과 융합하여 아시아 축구사에 남을만한 강력한 전력을 보이며 우승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항상 야유가 들끓는 역경 속에서 지코 감독의 강한 의지와 선수들 개개인의 성숙한 기량이 승부를 움직이며 기적적으로 역전우승을 만들어냈다.
이번 대회에서 거둔 일본의 우승은 이러한 특별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한국(이 대회로 대표팀을 은퇴하는 박지성을 위해 우승하자)과 호주(할리 키웨일과 팀 케힐 등의 황금세대들의 유종의 미를 위해 우승하자)와 같은 특별한 동기도 모티베이션도 없었다.
준비 부족과 부상자의 속출로 100%라고 할 수 없는 팀 전역. 경기마다 맞닥뜨려지는 곤란한 상황. 이 모든 일에 선수도 감독도 침착하게 대처하며 하나 하나 과제를 풀어나갔다. 그들이 뛰어 넘은 것은, 4년 전 똑 같은 준비부족 상태였던 오심 감독 체제하의 일본대표팀이 극복하려 해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벽이었다. 이러한 힘을 얻게 된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 이번 대회 최대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시리아 전처럼 골키퍼가 퇴장한 후 PK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준준결승인 카타르 전처럼 10명이 뛰면서 한 점 리드를 당한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았고 팀도 흔들리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경기에 이길 수 있다. 그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를 후보 선수를 포함해서 팀 전원이 잘 알고 있었다. FIFA월드컵 남아공 대회에서 이미 현시화되기 시작한 일본 팀의 강화는 카타르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테크닉, 피지컬, 전술적인 훈련 등 장기적인 안목으로 강화를 꾀해온 일련의 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두었음을 의미하며 남아공에서 탄생한 팀 스피릿과 신뢰감, 연대감의 진화를 의미한다.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의 채용이 이에 잘 부합되었다. UEFA챔피언 리그와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감독은 아시아의 긴장감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으며 일본 선수들도 그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되어 있었다. 첫 우승을 차지한 1992년 당시였다면 협회나 매스컴 등, 주위의 상황을 포함해 이만큼 순조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젊은 세대가 융합했다. 자케로니가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오카다 저팬의 골격에 카가와 신지, 요시다 마야, 리 타다나리(이충성) 등의 젊은 세대와 마에다 료이치, 이노하 마사히코 등의 대표선수 경력이 적은 선수들이 무난하게 융합되었다. 특히 전력 면에서 카가와의 골 앞에서의 다양한 움직임과 넒은 시야, 재빠른 판단은 지금까지의 일본인 선수에게는 없던 것이다. 단 일본 대표팀에서는 도르트문트(독일)에서처럼 그의 기량이 십분 발휘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제 기량이 발휘되고 있었는데 부상으로 인한 결장은 유감이었다.
특히 주목할만한 장점은 양 사이드백의 공격력이다. 남아공에서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는 나가토모 유토는 물론, 우치다 아츠토도 독일에서 수비력을 다져온 덕에 지금까지 없던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에 가담했다.
또한 한국 전과 호주 전 후반에서와 같이 피로에 의해 선수들의 발이 무거워졌을 때 힘이 되어 준 것이 혼다 케이스케의 강력한 개인기이다. 그의 볼 키핑력과 돌파력은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빛을 발한다. 나가토모와 우치다도 혼다가 볼을 가지고 있을 때만 마음껏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반대로 팀 동료와 상대가 피지컬 컨디션이 호조일 경우에 혼다의 플레이는 스피드가 떨어진다. 판단의 민첩함과 시야가 카가와에 미치지 못하여 두 선수 간의 스피드 차이와 리듬 차이가 일본 팀의 공격을 엉키게 만든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오카자키의 돌파 스피드와 볼런치, 하세베 마코토의 운동량이다. 그러나 하세베는 에너지가 고갈된 한국 전의 후반 이후에는 공격 면에서는 결국 부활하지 못했다. 엔도 야스히토도 벨렌서로서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으며 피지컬 컨디션만 충분하다면 종단 스프린터 역할도 곧잘 수행한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그는 자신의 최저한의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또 하나 염려된 점은 높이에 약하다는 것이다 타나카 마르쿠스 튤리오와 나카자와 유지를 뺀 중앙 디펜스는 요시다라는 후계자를 얻기는 했지만 호주와 한국 선수들의 높이를 이용한 공격에 대해서는 3백으로 막기에 급급했다. 호주 전만 봐도 콘노 야스유키의 왼쪽 사이드 백으로의 포지션 체인지는 실질적으로 4백에서 3백으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다. 신체능력이 좋은 장신의 센터백의 육성이 시급하다.
젊은 팀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임하는 침착함과 성숙도는 아시아 챔피언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일본의 최종 목적은 결코 아시아 챔피언이 되거나 아시아 왕좌를 유지하는데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 축구의 최종목표 역시 아시아에만 적용되는 챔피언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일본과 아시아 축구는 이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일본이 FIFA월드컵에서 8강, 4강에 들어가는 것이나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를 금방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만 우루과이라면 충분히 등이 보이는 위치에 있다. 우선 이 레벨에 도달해야 한다. 1999년 이후 2번째로 참가하는 7월의 코파 아메리카는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Text:Shuichi TAMURA
한국대표 총괄:대회 성적 3위
51년 만에 AFC아시아컵 제패를 기대하는 자국 축구팬의 응원이 힘입어 팀도 "왕의 귀환"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고 타이틀 탈환에 의욕을 보인 한국팀. 그러나 준결승에서 일본에게 PK전 끝에 아깝게 패하며 3위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한 만큼 팀을 이끌고 있는 조광래 감독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한번도 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못한 것은 감독인 내 책임이다. 일본 전에서 PK의 패전에 대한 책임은 선수들이 아닌 내게 있다.」
그러나 감독은 물론, 선수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오히려 들려온 것은 격려의 목소리. 그들이 귀국하는 인천공항에는 1000명을 넘는 환영인파가 몰려들어 도착로비가 마비될 정도였다.
조광래 감독에게도 비난뿐 아니라 긍정적인 평가가 들려왔다. 과거 AFC아시아컵을 3위로 마감한 한국대표팀의 지휘관들은 대회 직후에 경질되거나(2000년 대회 허정무), 사의표명(2007년 대회 핌 베어팩)등으로 물러났으나 FIFA월드컵 남아공대회 직후인 2010년 7월부터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 감독의 평가는 높다. 취임 당시에는 대표팀 지도 경험이 없는 점에 대한 불안 등을 이유로 외국인 감독 대세론을 주장하던 축구팬들도 의구심이 사라졌는지「FIFA월드컵 브라질대회까지 맡길 수 있겠다. 3위로 마감했으나 희망적인 부분이 많은 경기였다.」며 호의적인 반응을 많이 보였다.
실제로 챔피언 타이틀을 놓치기는 했지만 한국팀에게 있어서 AFC아시아컵 2011은 많은 희망이 엿보인 대회였다.
예를 들면 축구 스타일의 정착이다. 취임 당시부터 쇼트 패스를 많이 활용하는 빠른 패스 교환과 빈번한 포지션 체인지, 좌우 사이드백과 센터백의 적극적인 오버랩 등을 팀에게 요구해왔던 조 감독의 축구는 "조광래식 트랜스포머 축구" "만화 축구"라며 의문시되었으나 이번 아시아컵을 통해서 그 가능성이 보였다.
탐색을 거듭해 온 시스템도 정착했다. FIFA월드컵 남아공대회에서 4-4-2에서 3-4-2-1로 변신을 시도한 조광래 감독은 2010년 12월의 국내 합숙훈련부터 4-2-3-1 시스템을 도입, 이것이 경기를 거듭할수록 팀에게 맞춰져 갔다. 주 특기인 사이드 공격에만 의존하지 않고 중원에서의 정교한 패스 워크로 볼을 지배하고 찬스가 보이면 한 번에 치고 올라가는 폭발력을 겸비한 스타일은 압권이었다. 비록 오른쪽 사이드의 차두리가 돌파하면서 수비에 빈 공간이 발생하고 센터백 콤비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아 대회 통산 4번의 PK를 헌상한 수비와 후반 종반이 되면 급격히 페이스 다운이 되어 버리는 과제 등이 문제점으로 떠올랐지만, 「만화 축구가 현실이 되었다.」며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밝은 전망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다. 이번 대회에서 5득점의 활약으로 일약 팀의 주전으로 떠오른 구자철(21세), 대회 4득점의 지동원(18세), 이란 전에서 극적인 골을 성공시킨 윤빛가람(20세), 그리고 18세로 이 대회를 통해 대표팀 데뷔를 한 손흥민과 홍정호(21세) 등,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젊은 선수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들과 함께 FIFA월드컵 남아공대회에서부터 주전으로 자리를 굳힌 이청용(22세)과 기성용(22세)등도 가세하며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 한국대표의 주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세대교체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를 얻을 수 있었던 대회였다.
그러나 세대교체에 의해서 한국 축구계의 역사적인 한 시대가 끝나게 되었다. 이영표와 박지성이 대표팀 은퇴를 표명한 것이다. 과거 10년 이상 한국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해 온 두 선수가 이번 AFC아시아컵 2011을 마지막으로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벗기로 결심했다. 두 선수의 결단 배경에는「후배와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싶다.」는 희망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2002년의 FIFA월드컵 4강신화를 체험하고 그 후 유럽 등의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대표팀의 버팀목이 되어온 두 선수가 팀을 떠나게 된 것은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캡틴으로서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던 박지성의 대표팀 은퇴는 한국팀에 있어서 커다란 전력다운이 된 것은 부정할 수는 사실이다.
되짚어보면 박지성과 이영표가 한국대표로 정착하게 된 것은 바레인에서 치러진 2000년 아시아컵 이후이다. 즉 거기서부터 오늘날의 한국 축구의 성과와 발전이 시작된 것처럼 이제부터 한국 축구의 새로운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생 한국 대표는 전진을 시작했다. AFC아시아컵 2011의 여운이 채가시기도 전에 한국 대표는 해외원정을 단행했다. 2월 9일에는 터키 대표와 평가전을 치렀다. 새로운 캡틴으로 임명된 선수는 부상으로 AFC아시아컵에 출전하지 못했던 에이스 스트라이커 박주영. 프랑스의 AS 모나코에서 활약하는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타입의 스트라이커가 한국팀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다. 이 캡틴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지수이지만 박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 아니라 몸으로 팀을 인솔하며 한국 대표팀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물론 조광래 감독도 팀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젊은 체제로 바뀐 공격진에 비해 수비진은 30대가 주축으로 선수 층도 얇다. 센터백 콤비도 아직 확정되지 못한 채 불안정하다. 수비진의 불안 요소는 FIFA월드컵 남아공대회 직전부터 지적되어 온 문제점인 만큼 조광래 감독도 이점을 간과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감독 스스로 반성의 재료로 삼은「경기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체선수의 부족」도 앞으로 보강해야 할 문제점으로 지적된 만큼 이미 보완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왕좌 탈환은 이루지 못했지만 희망이라는 확실한 신호를 얻은 한국팀. 한 시대가 끝났으나 이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와 함께 한국대표는 어떤 진화를 이루어낼 것인가 비록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AFC아시아컵 2011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지금부터일지도 모르겠다.
Text:Shin Mu-Koeng
중국대표 총괄:대회 성적 조별리그 탈락
AFC 아시아컵 2011에서 조별리그 탈락을 맛본 중국. 평균연령 24세라는 젊은 선수들로 대회에 임한 중국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소위 베스트 멤버로 팀을 정비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가오홍보 감독은 AFC아시아컵 2011을 「젊은 선수 육성대회」로 명명하고 대회에 임했으나 만족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저조한 실적에 대해 여론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가오 감독은 대회 후에 「내 생각이 안일했다. 또한 선수기용과 지도에도 실수가 있었다. (특히 조별리그 2차전 카타르 전)」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만일 베스트 멤버로 팀을 정비했더라면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재난」을 경험한 중국 대표는 아직 쇠퇴기 한가운데 있다. 이를 딛고 일어서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축구협회 및 C리그에서 스캔들이 잇따르고 있어 중국 대표의 수준이 크게 후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오랫동안 계속된 스포츠 도박의 존재가 밝혀진 후 C리그에서는 경기 수준이 기대만큼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른 영향도 물론 선수들에게 파급되었다. 특히 디펜스 라인에 끼치는 영향은 가장 심각하다. 이번 AFC아시아컵 2011에서 중국 수비진은 조별리그 3경기에서 4실점을 만끽했다. 더구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등,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오홍보가 취임한 후에는 주로 양 사이드에서의 공격을 중시하는 4-2-3-1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이번 대회의 3경기 동안 중국의 오프 사이드는 7번. 같은 조를 선두로 돌파한 우즈베키스탄은 11번이다. 전술이 철저하게 실용화되지 못하는 가운데 선수들의 「앞으로 전진」이라는 공격의식이 부족한 것이 판명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번 중국이 올린 4골은 모두 프리킥과 코너킥에 의한 것이다. 세트 플레이 외에 필드 골은 하나도 없다. C리그에서의 경험을 대표팀에서 살리지 못한다기 보다 경험부족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또한 C리그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경기에서 선수의 주행거리가 약 8000m로 일본과 한국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진다. 쿠웨이트 전에서 중국대표의 총 주행거리는 106km였는데 컨디션 문제 때문이었는지 카타르 전에서는 97km로 감소했다. 우즈베키스탄 전에는 2-2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볼 지배력은 겨우 35%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C리그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음으로 인해 한편에서는 해외파 선수의 중요성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중국 축구협회와 클럽은 선수가 해외에 이적하는 것을 전력으로 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협조적이었다. 적어도 2000년의 AFC아시아컵 당시 중국에는 유럽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4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의 샬케04에서 출전기회가 적은 하오주민 한 선수뿐이었다. 비교해보면 2000년의 일본에서는 해외에서 합류한 선수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10명 가까운 선수가 해외파였다. 중국 축구선수가 유럽처럼 레벨이 높은 무대에서 배울 기회가 감소한 것도 우리들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이다.
가오홍보는 2009년 5월에 감독에 취임한 후 34전 18승 10무 6패라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승률이 좋아 보이지만 평가전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설명하는 의미로는 충분하지 않다. 특히 중요한 국제대회에서는 감독부터 선수까지 많은 문제가 드러나며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중국 축구협회측은 앞으로도 가오홍보 감독을 임용할 것으로 보이지만 더 수준 높은 외국인 지도자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프로리그의 재생이다. 그리고 선수들이 해외에서 스킬 업 할 수 있도록 협회차원에서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Text:Text:Wu Tong